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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글/영국생활

스코틀랜드 3년 사용기

by 헨젤과 그레텔 2022. 9. 16.

3년이니까 나도 써봐야지...


누군가 북유럽에서 3년을 생활하고 책을 썼다. 그리고 그가 한국과 그 나라를 비교하는 인터뷰가 담긴 기사를 봤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이에 이견을 적은 내 인용 트윗은 리트윗과 인용이 계속 늘었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만난 어떤 사람도 스칸디나비아의 어느 국가보다 스코틀랜드가 더 잘났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대한민국과 유럽의 국가를, 그곳에서 “3년” 지낸 사람이 그들의 삶이 우리나라사람보다 행복하지만은 않을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와 나라를 비교하는데 어느 한 나라의 잘못이 우리나라의 행복을 말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주재원으로 지냈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는 포퓰리즘이자, 해외 경험이 없는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에게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파시즘을 심어 줄 수 있었다.
책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 책은 절대 읽지 않겠다 마음먹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생각하지 않듯, 그 책을 읽는 사람들 역시 작가의 말은 모든이를 대변하지 않는 개인의 생각이며, 개인의 정치사상이라는 것을 알고 읽었으면 좋겠다.

2015년에 처음와서 그 해 3개월 그리고 매년 1개월 이상 스코틀랜드에서 보냈지만 내게 2019년 9월의 스코틀랜드는 그때와 같은 공항, 같은 도시가 아니었다. 어쩌면 평생 살아야하는 낯선 땅에 도착했다. 물론 아내와 이제 떨어질 일이 없을것이라는 행복은 큰 걱정을 덮어주긴 했지만 일자리를 잡고 새로운 사회와 어울리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칠 것이고, 내가 3년을 넘게 한국 땅을 밟지 못할 거라는 사실.

낯선 영어. 그리고 검증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경험없는 타지인을 쉽게 고용해주진 않을거라 짐작은 했었는데 아내의 도움으로 만든 첫 이력서와 내 대학시절 포트폴리오는 그저 시간을 태운 종이 몇 장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조차 건축과는 오랜기간 떨어져지냈고, 그렇다고 최근 경력인 전기분야로 회사를 찾자니 영국에서는 적어도 1년간의 교육과정을 밟고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야 겨우 취업이 됐다. 나는 꾸준히 세금을 낼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는데, 페인트칠을 비롯한 공사현장에서 동유럽사람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받는 이른바 캐쉬잡에 바로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석공을 하셨던 장인어른은 하루종일 일해도 피곤하지 않은 폴란드사람이 가득한 이곳 공사판에서 아시아에서 온 비실비실한 내가 잘 지낼 수 없을거라 단언하셨다.

2021.09.19 - [집사의 글/영국생활] - 빚쟁이, 스코틀랜드에서 생애 첫 집 장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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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 지난 2019 12 나는 사진촬영을 시작했고,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국에 먼저 덮치며 예약이 취소되는 틈을 식당 새벽청소일을 시작, 코비드19 식당조차 문을 닫았는데 바로 인력이 필요했던 슈퍼마켓에서 일을 구해 2년을 일했다. 그렇게 빚을 안고 도착한 스코틀랜드에서 우린 2년만에 에든버러 근교에 120살이 넘은 정원이 있는 집을 구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3년 (2019.9.16~2022.9.16)


2015년 봄, 처음 미국인 친구가 아내를 소개해줬을 때 “스코틀랜드 억양이 아주 강한 친구”라고 얘기를 해줬는데 나는 처음 만난 아내의 말투에서 스코틀랜드억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가 영어권 원어민을 만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것이었을지 모르겠는데 미국여행을 마친 후 2015년 여름, 스코틀랜드에 돌아왔을때 나는 아내의 말을 뺀 모든 사람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봐도 아내가 스코틀랜드 억양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다.

참고로 이때는 스코틀랜드 억양때문이라기보다는 내 영어능력이 부족해서 나타났던것 같다. 미국에서도 세 달 동안 겨우 귀가 트인 것 같았는데 새로운 곳에 오니 알아듣지 못한 것. 그 때부터 우리가 한국에서 지낼때까지 궁금한점이 있으면 아내에게 많이 물어봤는데 이제는 내가 꿀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아내덕분에 내 영어는 크게 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더 힘들었던 점은 이미 영국의 도시들은 다양한 외국인들이 함께 사는 동네. 온 세상 사람들이 다양하게 발음하는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는것이 또다른 과제였다.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말할 수 있는 아저씨들을 보기는 봤는데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모든 기차역에 스코틀랜드 게일어가 함께 표기돼있고 하이랜드를 가게 되면 주 언어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바뀐다.)

처음 스코틀랜드에 왔을때 반했던 점이라면 아내와 함께 만난 모든 사람들이 상냥하고 배려심이 넘치면서 자기 소신을 꺽지 않았다. 반대로 한국에서 지낼 때 만난 사람들 중 아내가 너무 만나기 힘들어했지만 마주쳐야했던 피치못할 관계가 종종 있었어서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기 어렵다거나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단 하나, 물론 세상 어디에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는 법. 무례하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 “못배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게 편하다. 그런 사람을 만난적도 별로 없었지만…
외국인으로 사는동안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생활을 했다.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주제로 말을 많이 거는 사회. 마트에서 일을 하면서 어 너 새로 일시작하는구나!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고 오늘의 날씨에 대해, 어제 일어났던 뉴스에 대해 음식에 대해, 오늘 저녁거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해진 많은 단골손님들은 그제서야 내가 어디 출신인지 물어봤다. 물론 내 말투가 원어민은 아니기에 충분히 일찍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보통 첫 만남에 물어보지는 않았고 다들 상냥하게 나를 일하는 그냥 사람으로 대해줬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스코틀랜드를 깎아내리는 농담을 자주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내가 이곳에서 평생 지낼 예정이라고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웩하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동시에 익살스러운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지어줬기에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곧 잘 파악 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여름은 한국보다 훨씬 시원하고 겨울은 한국보다 훨씬 따뜻하다. 슬프게도 내가 이사올 때 까지만해도 허허발판이었던 여기저기에 어마어마하게 큰 주택단지가 들어섰다.에든버러도 나름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도시가 되어가는 중인가. 그런데 그 단지들이 한 두 달만에 뚝딱뚝딱 지어지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한국에서 건축일을 조금 손 대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하자면 벽이 정말 얇고 단열재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평균기온을 보면 그것도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지금 지내고 있는 집은 122년된 건물에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외벽에도 오래된 창문으로 여름에도 집에서는 발이 시려울 정도로 시원한데 세번째 겨울이자 에너지비용이 폭발한 이 시점에서 올 겨울은 아주 혹독할 것 같다.

여름은 생각보다 화창한 날이 많다. 해도 10시가 넘어야 지기시작하고 간혹 비가 오지만 4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는 시원하고 햇빛도 자주내리쬐는 좋은 날들이 많은 느낌이다. 대신 그 시기가 지나면 암흑의 기간이 곧바로 찾아온다. 한국에서 건축을 할 때 그렇게 남향에 대한 이점을 많이 이야기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남향이 좋은건 분명하지만 여름에는 덥지도 않은데 해가 너무 길고 겨울에는 해가 짧고 날씨가 자주 흐린탓에 굳이 남향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아파트가 별로 없고 대부분 벽이 붙은 주택 혹은 일반 주택이라 보통 두 방향에서는 해를 받을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하다.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자연환경이나 사람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진보적인 것. 소득세도 비약하게나마 잉글랜드보다 높고, 외국인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스코틀랜드 내에서 진행하는 모든 투표에 참가할 수 있는 것, A레벨이라는 차별교육이 없는 것, 공용화장실에 화장지와 같이 생리대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 등을 보면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고자하는 노력이 보인다. 정치는 역사 그리고 지금 사회현상과 끈끈하게 연관되어 있어 스코틀랜드 정치판을 이해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이 필요하겠지만 언제나 마음 따뜻해지는 정책들이 시행되는 것이 눈에 보이니 어딘가 조금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3년 밖에 지내지 못했고 돈 모으느라, 코로나바이러스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느라, 우리 둘 앞가림 하느라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 한 느낌이다. 그래도 주저리 더 이야기를 적자면, 의료서비스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접종을 받은 것 이외에는 방문한 적이 없어 할 이야기가 없지만 갑자기 아프다면 예약도 힘들고 치료받기도 힘들다. 2018년 1월 비자없이 방문했을때 한국에서 세 번 겪은 급성후두개염이 밤사이 발병해 아침에 급히 병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처음 병원비를 내고 검사하는 병원에 갈때 한 번, 의사를 만나러 또 한 번해서 두 번 구급차를 탔고 결국 의사를 만났는데 구급차를 탄 이후로는 병원비를 내지 않았다. 생명에 관한 일에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정책. 그렇지만 지금 비자를 받고 온 나는 비자 발급시 1년에 약 8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을 외국인 보험비로 냈는데 월급에서 남들과 같이 또 세금을 낸다. 결국 의료비용이 두 배로 나가는 것은 정말 안타깝다.

고생했다. 더 고생하자.


지금은 물가가 많이 오른데다 임금이 오르지 않아 다양한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 파업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1년 전까지만해도 자기 자리에 만족하고 욕심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팬데믹 전에 한 달동안 역사깊은 건물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새벽부터 청소일을 했었는데 식당은 한 달만에 문을 닫게 됐다. 당시 정부에서 수입의 80%를 지원해줬고 레스토랑에서 20%를 덤으로 지원해줘 네 달간 100%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름 사회 최하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면 최대한 다같이 살고자 하며 회사에서 나서서 도와주니 나같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됐다. 물론 경쟁이 없다는 것, 사회가 도태되는 것이라고 한국에서 그렇게 자주 듣고 배웠지만 이렇게 욕심이 없이 일하는 사람이 많아도 사회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 배후에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 있는지도 잘 살펴봐야 한다. 많은 귀족들, 오랜 가족에게서 내려오는 재산, 부의 되물림, 지식의 되물림 등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스코틀랜드가 영국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내가 최저임금을 받고 일을 해도 딱히 불만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나름 잉글랜드에 피해를 받는 피해자라고 이야기 많이 하지만 그래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같은 뜻으로 영국의 하나가 됐고 제국주의시대를 함께 지나왔으므로 그 방면에서는 잉글랜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어떻게 사는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한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지 않으면 한참 늦어지는 곳에서 내 꿈을 위해 달렸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더군다나 그렇게 꿈을 위해 달리는 사람도 아니었지. 하루하루 돈이 모이면 쓰는 재미, 친구 만나는 재미에 빠지고, 그렇게 미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어릴때여서 그랬던 걸까. 아무래도 나는 나와 내 가족 외 제 3요소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 글이 너무 스코틀랜드 찬양이 됐을수도 있다. 3년뿐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이 감정들은 크게 요동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기분을 잘 기록해놓고 앞으로 5년, 10년, 15년 나는 어떤 사람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지내고 있을지 예상하고 맞이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여기서 제일 아쉬운 것이 있다면 누가 뭐라해도 가족. 가족과 늘 함께했던 내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것. 이곳에서는 정말 많은 가족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 살아가지만 그래도 가족은 언제나 바로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슬프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

3년간 믿기지 않는 여러 일들을 겪으며 아내와 고생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에서 2주가 흘렀다. 좋은 날만 지나가지는 않겠지. 앞으로 더 힘든 상황을 겪게 된다해도 어쩔 도리가 있나. 그때도 이렇게 같이 고생하면서 지내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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