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
2015년 약 3개월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스코틀랜드에 들렀다가 여자친구와 약혼을 하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직장에서나 친구들, 지인들은 나를 유럽 사람과 사귀는 한국 남자, 혹은 백인 여자친구가 있는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을 만날 때면 여행이야기가 너무 신나서 주저리주저리 거침없이 쏟아냈었는데, 결국 뭔지 모르게 혼자 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6개월을 여자친구가 한국으로 도착할 날만을 기다리며 입을 닫고 지내게 됐다.
아무튼 내가 2015년 늦 여름 한국에 도착하고부터 6개월 뒤인 2016년 초에 여자친구가 한국에 도착했고 그러부터 2년 동안 함께 한국에서 지내면서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시간을 보낸 건 맞지만 사실 동시에 잊고 싶을 만한 경험도 많이 했다.
혐오와 혐오
특히 백인 여자친구, 아내를 둔, 아니 백인 여자와 함께 있는 한국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쑥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아내가 한국어를 조금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부정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면을 많이 보게 됐다.
어떤 커플은 바로 뒤에서 “오빠, 오빠는 백인이랑 사귀고싶은적 있어?” 라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등산아저씨는 잔뜩 취해 “미국인이랑 사귀면 어디가 좋을까” 라기도 했다. (더 많지만 여기서 줄이는 걸로. )
특히 백인 여자를 어떻게 사귀냐?는 면전 질문은 나를 몹시 당황하게 했다. 처음에 들었을 때도 두 번째 들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세 번째 네 번째 들었을 때도 늘 같은 대답이 입에서 나왔지만 언제나 당황스러웠다.
“나는 용기가 없어 그러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 있느냐”
라는 기혼자들의 질문은 더 당혹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럼 지금 남편/부인이 외국 사람이었다면 만나지 않았을 거냐”
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되더라고요. 인생이 참 신기하죠. 제가 아내한테 늘 고마울 따름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대단하다. 난 한국인이랑 결혼할거야.” 라고 말한 어떤 이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통계적으로도 유럽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의 결혼 비율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높기 때문인지 술 한잔에 대뜸 정신을 놓고
“백인 여자친구를 사귀는 방법 좀 알려줘(봐/요)”
는 어이없고 말도안되는 부탁을 받기도 여러 번이었다. 김치녀를 만나기 싫다는 둥.
처음 그들에게 “사람 사귀는 게 이 사람이 영국 사람이라, 백인이라, 사귀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서로 잘 맞고 뜻이 같기 때문에 사귀는 것”이라고 천천히 하나하나 말해줬는데,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는 분위기와 진심으로 알고싶어하는 분위기를 몇 번 겪고 나서부터는
“내가 당신 아버지를 욕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들이 어머니한테 어떻게 하는지, 그것만 따라 하지 않으면 사귈 수 있을거예요.”
라고 둘러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정말 뭔가 “방법”을 알려줘야 잘난척한다는 느낌 없이 대화가 끝날 것 같아서. 역시 인생과 결혼은 타이밍이라는 지루한 이야기를 첨부하면서 말이다.
(반대로 내가 아내의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어느 누구도 그딴 질문을 내 앞에서는 물론, 영국을 떠나 한국살이를 결정했었던 아내에게도 퍼붓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
아버지 얘기를 해보니 내가 지금의 장인어른을 처음 본 날이 생각난다. 딸의 남자친구가 한국 사람이라는데 궁금할 법하지만 당시 아내는 직장에 있었고 아버지가 방문한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버릇없이 집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뒹굴다 낮잠에 빠져버렸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방문해 함께 식사를 했던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퇴근 후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자친구 집으로 들어와 고양이 두 마리를 배 위에 놓고 같이 자고 있는 나를 두고 거실에서 TV를 켜고 와인을 따 마시고 계셨다.
나는 낮잠에서 깨 TV 소리를 듣고는 거실로 가
“아, 죄송해요. 이미 와계셨네요(당황). 한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했고(물론 존댓말은 없다.)
“고양이들이랑 자고 있어서… 나도 여기서 씻고 할 일이 있었으니 깨우지 않았어 괜찮아. 이야기는 종종 들었어(웃음)”
라고 대답하셨다. 오늘 어땠냐 저쨌냐 특별한 말이 없었던 그날이 기억난다.
내가 한국의 어느 아버지들이라도 친구네 집에서 자고 있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을지 모르겠다만, 이제 만날 수 없는 장인어른과 나는 서로 손가락 욕도 하고 지내는 정도로 거침없는 관계였다.
우리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더 심하고 장인어른과 사위의 그것은 더욱 더 어려운 것 아닌가...?
난 몽골에서 가오겔1을 아주 감명 깊게 본 기억이 있어서 한국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보고 마블의 가오겔2가 개봉했을 때 같이 봤는데, Cat Stevens의 Father and Son 이 흘러나올 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왜일까. 내 아버지와는 다른 이 노래의 화자가 마음에 와닿는 건…?
나는 이 세대가 지나면 우리나라도 조금 더 가족에서 자유로운 가정들(나는 이게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개인주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이 주를 이룰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가사에서 특히
“너가 원한다면,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하는 구절이 좋다.
Cat Stevens - Father and Son
It's not time to make a change
지금 변화가 필요한 때는 아니야
Just relax, take it easy
그냥 편하게 쉽게 생각해
You're still young, that's your fault
네가 아직 어린 거, 그게 문제지
There's so much you have to know
아직 알아야 할 것이 정말 많을 거야
Find a girl, settle down
여자를 찾고, 정착을 해
If you want you can marry
하고 싶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Look at me, I am old, but I'm happy
나를 봐. 나는 늙었지만 그래도 난 행복해
I was once like you are now, and I know that it's not easy
나도 너 같은 때가 있었어, 그래서 알아. 쉽지 않은 거
To be calm when you've found something going on
그거, 뭔가 일어났을 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
But take your time, think a lot
근데 시간을 가져봐, 생각을 많이 해보고
Why, think of everything you've got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생각해보는 거지
For you will still be here tomorrow, but your dreams may not
너에겐 내일이 있잖아. 근데 네 꿈은 바뀔지도 모르거든.
How can I try to explain? 'Cause when I do he turns away again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셨지
It's always been the same, same old story
그렇게 늘 같은 이야기였어
From the moment I could talk I was ordered to listen
내가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 말을 계속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거든.
Now there's a way and I know that I have to go away
이걸 이겨내려면 떠나야 된다는 걸 알고 있어
I know I have to go
떠나야지
It's not time to make a change
그래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때는 아니야
Just sit down, take it slowly
그냥 앉아서 천천히 해봐
You're still young, that's your fault
네가 아직 어린 거, 그게 문제지
There's so much you have to go through
아직 헤쳐나가야 할 것들 이 많아
Find a girl, settle down
여자를 찾고, 정착을 하겠지
If you want you can marry
하고 싶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Look at me, I am old, but I'm happy
나를 봐. 나는 늙었지만 그래도 난 행복해
All the times that I cried, keeping all the things I knew inside
나는 울 때마다 내 속마음을 모두 감쳐왔어
It's hard, but it's harder to ignore it
무시하는 게 감추는 것보다 더 힘들더라고.
If they were right, I'd agree, but it's them they know not me
그게 맞았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겠는데, 틀린 지 아닌지는 그들 생각이었지. 내 생각이 아니었어.
Now there's a way and I know that I have to go away
근데 지금은 이걸 이겨내는 법을 알고있어
떠나야 된다는 거
I know I have to go
떠나야 돼.
'술 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넷플릭스 <더리퍼>, 1970년대 영국을 혼란에 빠뜨린 연쇄살인마. 요크셔리퍼 Peter Sutcliffe 에 대한 다큐멘터리 (0) | 2021.01.07 |
---|---|
Alone Again - Gilbert O'Sullivan (feat. 썸머 타임 머신 블루스) (0) | 2020.11.05 |
넷플릭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 파이어 사가 스토리 (0) | 2020.07.14 |
Outlander 아웃랜더와 스코틀랜드, the Skye Boat Song (0) | 2020.04.30 |
나르코스 (그리고 Tuyo 가사 해석) (0) | 2020.04.23 |
댓글